독립운동기지화의 핵심 거점인 노령 연해주 지역에서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64년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노령 연해주의 한인사회는 1910년의 ‘합방’까지 20여만 명을 헤아렸다. 이들은 황무지 개척과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발추진에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생활터전을 닦고 한인사회를 이룩했다
(1922년까지) 이후 소작권 이동 반대투쟁
4. 전남 무안군 암태도 소작쟁의
1923년 가을 암태도 소작회 결성, 소작료 4할 요구 쟁의 전개. 1924년3얼-7월 지주와 경찰을 상대로 한 농민투쟁이 전개, 동아일보의 지원과 전국 노동, 농민, 청년단체의 지원활동, 일제 경찰의 중재로 소작료 4할 획득하였다.
1990) 이후 겨우 사할린 거주 동포들의 귀국길이 열렸다. 한편 일본은 확전에 따른 병력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조선인 징병정책도 실시, 36만여 명의 조선인이 군인, 군속으로 전장에 끌려가 그 가운데 2만여 명이 사망했다.
1923년 9월1일 일어난 간토(關東)대지진은 멸시와 차별 속에 살아가던 재일조선
조선인들에 대한 보상은 오늘날 일본정부와 한국정부 양측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
1940년대 후반 ~ 1950년대 ( 이어서 )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각각 수립되며, 모든 재일 한국인이 일본국적 남, 북 중 두 국적 중 택일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
-한반도 분단 이후 재일교포 사회